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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주는 깨달음 :: 세상에 이치

맘야 2014. 9. 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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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주는 깨달음


필자의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하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대 자연’이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벌레, 곤충, 새, 바다, 바람, 구름, 태양, 하늘은 나를 위해 가까이 와서 노래하며 응원해 주었다. 대 자연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자연에 속한 인간이란 것을 느껴가기 시작할 때 썼던 일기에 내용을 적어본다.


마음이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주변이 내 마음을 흔들고 헷갈리게 하고 있다. 이렇게 느끼는 내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지만 힘들다.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알까?’ 기억하는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을 치유 중이다.


사마귀 한 마리가 아스팔트를 힘겹게 걸어가는 것을 봤다. ‘자연의 이치대로 되려니…….’하는 맘으로 지나가려다가 계속 마음이 쓰여서 한참을 지켜보다가 결국에는 집어 들었다.


풀 위에 놓아줄 생각이었는데 앞발로 할퀴려 하려는 것에 놀라 그만 놓쳐 버렸다. 내가 해칠 맘이 없더라도 사마귀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만하다. ‘다시 들어 올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좋게 해주려는 내 마음을 몰라 발버둥 치다가 또 떨어지면 더 다치려니 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그리고 도로 위에서 인도 위로 오른 성과도 있었다.


몇 걸음 옮기다 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또 있었다. 이 녀석은 날개가 갈색에 건강해 보였다. 좋은 마음으로 살짝 건드렸는데 빠른 걸음으로 달아나서 서로 놀랐다. 또 놀랄까 싶어 그냥 두었다.


몇 걸음 더 옮기니 이번에도 사마귀 한 마리가 있었다. 앞의 녀석처럼 날개가 갈색에 건강해 보였다. 바라보다가 이번엔 그냥 걸음을 옮겼다.


더는 사마귀가 보이지 않았다.


집 앞 계단에 이르다가 작은 과자 조각에 붙은 수많은 개미를 보았다. ‘저 과자가 내 신세인가.’하는 마음이 들었다.


좀 더 오르니 놀랄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큰 사마귀 한 마리가 수많은 개미에게 공격당하고 있지 않은가! 아까 본 사마귀 중에서 힘겹게 걸어가던 그 사마귀랑 모양이 비슷했다. 가끔 발을 움직이는 것이 아직 살아 있었다.


여러 가지 마음이 생겼다. 내 손에는 뜨거운 물이 담긴 컵라면이 들려 있었고 작은 봉투도 하나 들고 있었다. 라면이 불어터지는것에 상관없이 옆에 놓고 쭈그려 앉았다.


이것도 ‘자연의 순리대로 놔둬야 할까?’ 몸통이 약간 꺾여있는 것이 많이 다쳐서 곧 죽을 것만 같았다. 보다 못해 나무젓가락을 꺼내서 뒤집어 주었다. 자꾸 발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세워주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날개를 펴려고 펄럭이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겨내라.’고 응원하면서 방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했다. 올라가면서 ‘개미들을 다 털어주고 풀 위에 올려줄 걸 그랬나?’ 싶었다. 라면을 먹으며 생각이 드는 게 ‘처음 봤던 사마귀를 제대로 구해주지 않아서 그 결과를 보여주나?’


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오는 길에 그 사마귀를 확인해봤다. 움직임이 없는 걸 보니 죽은 것 같았다. 거의 예상한 일이었다. 불쌍한 마음에 명복을 빌어주었다. 구할 거면 제대로 구했어야 했다. 힘겹게 걸어가던 맨 처음 사마귀를 놓쳤을 때 ‘집어 들자마자 풀 위로 던지면 됐을 것을’하고 후회했다. 개미에게 공격받던 사마귀도 ‘탈탈 털어서 풀 위로 던져줬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배려와 이치 사이에서 결정을 잘못 내렸나?’


집착이 번뇌를 만든다. 번뇌는 생각을 괴롭힌다. 마음이 편하려면 번뇌를 버려야 한다. 위의 이야기는 내 삶의 한 조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잘못했다고 생각 말자. 집착하지 말자. 명복을 빌어 주는 걸로 만족하자.’

‘긍정하자.’


다음날, 어제 그 길을 내려오다 비슷한 위치에서 사마귀 한 마리를 또 봤다. 몸길이가 손바닥 만큼으로 어제 처음 마주친 녀석과 비슷했다. 그런데 오늘 마주친 녀석은 날개가 갈색에 번들거리는 것이 건강해 보였다. 앞에 쪼그려 앉자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라니. 큰 눈에 까만 눈동자가 구르는 듯 나를 보았다. '안녕?' 한마디 하고서 지나쳐 걸어왔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각본인가?’


며칠 전에는 세상에 우연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돌멩이 한 개, 풀 한 뿌리. 이 모든 게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함께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오늘 사마귀를 보고선 ‘세상은 모두 우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우연인 거다.’


다만, ‘그 우연을 사람의 머릿속에서 필연으로 운명으로 재구성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런 작은 작용들이 모여서 큰 운명도 만들어지는 것인가 보다.


치유의 방법을 계속 달리하고 있다. 지금은 가벼운 산책과 명상, 법화경 읽기다. 법화경은 비유 품까지 읽었다. 여래는 항상 어디든 존재해 왔고 방편으로 제도한다고 한다. 수많은 모습과 작용으로 가르친다고 했다. 수많은 방편이지만 뜻은 단 한 가지 ‘불승’이란다. 마음을 다스리기에 어떠한지 아직 판단은 못 내리겠지만 험난한 세상에서 앞으로 내가 겪을 일들에 희미하나마 등대의 빛이 보인다는 생각으로 의지하는 독경생활 해보련다.


에너지.

작용과 반작용.

차원.


이 세 가지가 어제부터 머릿속에서 뱅뱅 돈다. ‘답이 나오겠지.’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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